•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글로벌 커리어 확장을 꿈꾸는 직장인에게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전 세계 미디어를 전담할 팀을 구글 본사에 신설해서 각국 팀들과 유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한 지 정확히 2주 만에 팀이 만들어졌다. 그 자리에 관심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당연히 로이스(나의 영어 이름)가 와야지!”라는 답이 왔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날아왔다. 2019년 가을 일이다. 내가 미국 본사로 옮겨온 과정은 정말 극적이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직장인들의 커리어 확장에 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토요일 종일 이루어진 일정에도 수백명의 참가자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여했다. 내가 늘 받는 질문은 ‘구글 본사에 어떻게 가게 되었나’다. 그러면 나의 본사 이동 스토리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거기에 꼭 덧붙이는, 그러나 더 중요한 말이 있다. 글로벌 커리어를 위해서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두 가지 면에서다.     ■  「 10년 준비, 기회 온 구글 본사행 내 관심사 적극적으로 알려야 영어 공부는 수익률 좋은 투자 기회는 언제 어떻게 올지 몰라 」    [일러스트=김지윤] 첫째, 내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미리미리 표명하라. 내가 가고 싶은 팀에서 일하는 동료나 매니저를 평소 주기적으로 만나 그 팀이 하는 일을 알아둔다. 그래야 내가 그 일을 정말 좋아하는 건지, 그리고 그 일을 잘하려면 어떤 자질과 능력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구글코리아에 있던 한 동료는 일본에만 있는 광고정책팀이 한국으로 출장 오면 늘 미팅을 요청해 만났다. 그렇게 팀을 알아가고, 팀원들과 네트워크를 쌓으며 자신을 알렸다. 4년째 되던 해 그 팀에 자리가 생겼고, 그 자리에 지원했다.   경쟁이 치열하겠지만, 당신이 그 팀 매니저라면 누구를 뽑겠는가? 지난 3~4년 꾸준하게 그 일에 관심을 표명하던 후보를 당연히 더 신뢰하게 된다. 나의 경우도 ‘전격’ 발탁처럼 보였지만, 사실 평소 나의 아이디어를 한국 너머 세계의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나누어 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본사 인사 담당자는 내 제안이 수년 동안의 인사이트와 경험, 고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내가 그 자리에 관심을 표명했을 때 바로 불렀던 것이다.   둘째, 언어다. 30년간 미국계 외국 회사에 근무하면서 영어는 필수였다. 미국에서 MBA(경영 석사)를 마친 유학생 영어 수준을 가졌던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영어에 대해 추가적인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았다. 그런데 일을 할수록, 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높은 수준의 영어가 요구됐다. 부서장이 되니 옆 팀을 설득해 협조도 받고, 본사 최종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해 예산도 따와야 한다. 영어를 잘하지 않고서는 일을 잘할 수 없었다. 전에는 이 세상에는 두 부류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영어를 잘하지만 일 못 하는 사람. 나머지는 영어는 좀 못하지만 일은 잘하는 사람. 나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름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영어를 못하면서 일을 잘할 수가 없다.   물론 영어 공부라는 게 쉽지 않다. 꾸준히 중단 없이 하는 게 쉽지 않다. 매일 해도 해도 제자리 같다. 뒤늦게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원어민처럼 혀가 말랑말랑하게 잘 돌아가는 후배나 동료들과 비교하면 지금 해서 뭐가 되려나 씁쓸해지기기도 한다. 하지만, 상투적인 말 같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나는 마흔살에 영어를 소리공부(파닉스)부터 새로 시작했다. ‘apple’이 ‘애아~플’처럼 발음되고 studying은 ‘스타딩’이 아니라 ‘스타디~잉’으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40년 동안 잘못 발음했던 것을 고쳐가는 일이 즐거웠다. 그렇게 10년을 매일매일 영어 공부에 시간을 쏟았다. 그리고 본사행 기회가 왔다. 10년 전에 시작한 영어 공부가 아니었더라면 원어민들로 가득한 커뮤니케이션팀 자리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지원할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물론 미국에 와서도 5년 동안 매일 원어민 튜터를 만나고, 영어 오디오북을 두시간씩 듣는 등 하루 서너 시간을 영어에 쏟았다.   물론 위 두 가지는 꼭 글로벌 커리어 확장을 위해서만 필요한 건 아니다. 어느 기업에 있든지 다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글로벌 커리어 기회가 반드시 한국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내에서도 기회가 많다. 요즘은 한국 스타트업들이나 중소기업들의 서비스 및 제품들이 대부분 글로벌 시장으로 나간다.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만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는 점점 줄고 있다. 어떤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대형 회사에 인수되면서 하루아침에 미국 회사가 되는 바람에 영어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경우도 봤다. 기회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준비하자. Cheers!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4.04.08 00:18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협업을 부르는 종소리, 땡땡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땡땡땡! 언제 종을 쳐본 적이 있었던가? 미국 수퍼마켓 체인 중 수년째 고객만족도 1위인 트레이더조(일명 ‘트조’)에서 일하면서 1년 간 종을 엄청 쳐댔다. 구글 본사가 있는 마운틴뷰 트조 매장에는 각 계산대 앞에 종이 하나씩 달려있다. 트조 계산대 직원(캐셔)들은 무슨 암호인 양 종을 각기 다르게 울려댄다. 땡, 땡땡, 땡땡땡, 땡땡땡땡.     ■  「 고객만족 1위 수퍼마켓의 비결 빠른 고객응대 위해 종소리 소통 종 울리면 하던 일 멈추고 달려와 ‘남의 성공=내 성공’은 불변법칙 」    실리콘밸리노트 땡. 종 한번. 계산대에 고객들의 줄이 길어지니 계산대를 비운 사람은 바로 계산대로 돌아오라는 소리다. 트조는 계산대를 유기적으로 운영한다. 가령 계산대가 10개지만 좀 덜 바쁜 시간에는 너덧 군데서만 캐셔가 일을 하고, 나머지 캐셔들은 제품 진열 같은 일을 한다. 그러다가 종소리 한번 땡하고 울리면 재빨리 계산대로 달려온다. 우리 매장에서는 계산대 앞에 고객들이 두 명 이상 서 있는 모습을 못 본다. 고객들이 기다리지 않도록 캐셔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땡땡. 종 두 번. 캐셔에게 뭔가 도움이 필요한 거다. 예를 들면 고객이 달걀 10개들이 한 케이스를 샀는데, 케이스를 열어 확인해보니 계란 하나에 금이 가 있다. 직원은 앞에 있는 종을 두 번 울린다. 그 소리를 듣고 한 동료가 “Two bells!”라고 외치며 달려온다. 종을 친 동료의 부탁을 받고 달려온 동료는 매장선반으로 달려가 새 계란을 갖다 준다. 봉지에 담긴 사과 중 멍든 사과를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종소리를 듣고 달려온 동료가 새 사과 봉지를 갖다 준다. 고객이 집에 갔더니 계란이 깨져 있다든가, 사과가 멍들어 있다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트조 직원들은 고객 입장에서 고객보다 더 까다롭게 제품을 살핀다.   땡땡땡. 종 세 번. 계산대 직원이 매니저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환불이나 교환을 요청하는 고객이 오면 종을 세 번 울린다. 매장에는 매니저가 서너명 일하고 있다. 매니저들은 해당 계산대로 달려와 환불해 준다. 트조는 묻지 마 환불 정책을 갖고 있다. 이유 안 물어본다. 정말 다 먹고 온 과자봉지를 가지고 와서 “너무 매워서 먹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고객에게 돈을 돌려준다. 포장지에 ‘very spicy’(매우 매움)라고 적혀 있는데도 말이다. 너그러운 환불정책으로 손해가 많이 날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3달러짜리 제품 하나 환불하러 온 고객들 대부분 카트 한가득 다시 쇼핑하고 간다. 신뢰가 있기 때문에 맘껏 쇼핑한다.   땡땡땡땡. 종 네 번. 아,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다. 매장에 일하는 모든 직원(거의 40명가량)이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계산대 쪽으로 와야 한다는 신호다. 모든 직원이 즉각 합심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딱 두 번 들었다. 한번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쇼핑객들이 갑자기 쏟아져 각각의 계산대 줄이 10m를 넘어섰을 때다. 종소리가 네 번 울리자 매장 곳곳에서 일하고 있던 매니저들과 모든 직원이 계산대로 와서 계산을 돕거나 장바구니에 물건 넣는 일을 했다. 또 한 번은 매장 물건을 훔쳐가려던 도둑이 주변 고객에게 들키자 와인 세병을 매장 바닥에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매장 곳곳이 산산이 조각난 와인병 유리 조각으로 덮이고, 엎질러진 와인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네 번의 종소리에 순식간에 달려온 모든 직원이 미끄럼주의 푯말, 빗자루, 쓰레받기, 걸레, 와이퍼, 바닥 청소기 등을 갖고 와서 청소해 5분도 안 되어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다시 깔끔해졌다.   트조의 이 종소리 시스템은 협업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자기가 맡은 일로 바쁜 상황인데도 다른 동료들을 도우려고 다들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인다. 특히 도움이 필요한 캐셔가 땡땡하고 두 번 종을 울리면 그 소리를 듣고 동시에 달려오는 직원이 서넛은 된다. 물론 가장 빨리 외친 사람이 와서 도와주게 돼 있다. 그러면 한발 늦어 헛탕친 동료들은 가장 빨리 달려간 동료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면서 “You won!(네가 이겼다)”면서 웃으며 돌아간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내가 구글에 다니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런 협업 문화였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두 같이 성공해야 한다. 트조에서는 모든 직원이 시간대별로 캐셔 역할을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 주는 동료가 얼마나 고마운지 안다. 그렇기 때문에 종소리 두 번을 들으면 질세라 하던 일 멈추고 무조건 달려오는 거다. 남의 성공이 내 성공이 되는 기업문화가 있어야 조직이 성공한다. 20만명에 가까운 거대 기업 구글이나 200명도 안 되는 작은 조직인 수퍼마켓도 예외가 아니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4.03.04 00:26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2024년 새해엔 사이드 허슬?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한 사회나 조직의 구성원으로 오래 있다 보면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일어난다. 5년, 10년, 20년을 회사에서 생활하다 보면 내 회사나 내 산업 밖의 지식이나 경험이 점점 좁아져 많은 직장인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회사일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그곳 너머의 새로움을 동경하기도 한다.   나는 회사생활 30년 만에 그동안 익숙했던 곳 바깥으로 나가는 일명 ‘실리콘밸리 몸체험’이라는 갭이어 프로젝트를 올해 시작했다. 책상머리와 노트북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전혀 경험이 없었던 산업세계를 알게 되고, 안 쓰던 근육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이드 허슬(side hustle)’을 떠올렸다. 사이드 허슬이란 직장을 다니면서 본업 이외에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갭이어 프로젝트로 미국 수퍼체인 트레이더 조에서 일하고,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를 하고, 공유운전 리프트 운전을 하면서, 올해 내내 이런 일을 구글에 근무하고 있을 때부터 사이드 허슬로 미리 시작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  「 미국 직장인 둘 중 한 명꼴 가져 급변하는 사회서 타 업계 경험 커리어 확장·전환 준비할 기회 」    실리콘밸리노트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직장인 둘 중 한 명꼴인 45%가 사이드 허슬을 갖고 있고, 30%는 기본 비용을 커버하는 수입도 올리고 있다. 사이드 허슬은 부가 수입을 확보하는 것 이외에 요즘처럼 급변하는 직장 환경 속에서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내가 몸담고 있지 않은 타 산업계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를 넓힐 수 있어, 추후 경력개발이나 전환에 도움이 된다. 내 갭이어 프로젝트가 사이드허슬은 아니지만 미래에 내가 일할 수 있는 분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미국 수퍼체인 트레이더 조에서 일하면서는 산지에서부터 식탁까지 올라오는 식료품의 생산 사이클을 비롯하여, 전략적인 서플라이 소싱과 리테일 마케팅 전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히 아마존으로 대변되는 현대 마케팅 트렌드를 완전 거꾸로 가고 있는 트레이더 조의 3무 원칙, 즉 ‘No 온라인쇼핑’ ‘No 배송’ ‘No 멤버십’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마케터로, 커뮤니케이터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스타벅스 바리스타를 하면서는 모바일 마케팅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회사답게 멤버십을 통한 효과적인 프로모션 전략 및 업셀링(좀 더 좋고 비싼 제품을 사도록 유도)과 크로스셀링(다른 것을 함께 구매하도록 유도)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또한 리프트 운전을 하면서는 우편물에도 적용 가능한 물류 배송 신산업과 자율주행 트럭 소프트웨어와 같은 첨단 기술 산업에 대한 지식까지 갖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16년 동안 구글에 있으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둘째, 사이드 허슬의 장점은 일하는 즐거움과 잠재력 개발이다. 본업 외 다른 일을 하게 될 때 본업에 대한 충실도가 떨어지는 도덕적 해이에 대해 ‘본업 회사들은’ 걱정을 한다. 그래서 어떤 회사들은 이중 취업 금지 규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우리 관심과 충성도가 제로섬 게임이어서 어느 하나에 정신을 빼앗기면 다른 나머지는 줄어든다는 공식이다. 그런데 미국 한 서베이에 의하면 사이드 허슬러의 36%가 사이드허슬로 인해 오히려 본업을 더 충실하게 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대부분은 주 5~10시간을 사이드 허슬에 보내고 있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고 해볼 만하다.   실제로 트레이더 조에서 만난 한 중견기업의 마케팅 매니저 니콜라스는 일주일에 한 번만 일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차후 리테일 분야로 옮겨올 생각에 미리 필드 경험을 갖는 중이다. 준공공기관에서 신입 2년차로 일하고 있는 스타벅스의 한 바리스타는 팀 매니징하는 경험을 빨리 배우고 싶어서 바리스타를 한다고 한다. 스타벅스 매장 시프트매니저인 이 바리스타는 팀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작은 규모이지만 리더십을 발휘한다. 내가 사람을 뽑는 입장이라면 같은 신입 2년차라고 하더라도 이 바리스타의 리더십 경험을 높이 살 것 같다. 팀원을 가져본 사람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천지 차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사이드 허슬은 커리어 확장에 대한 기회와 일하는 즐거움 창출이라는 장점이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무엇보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업무로 육체 피로가 이미 한계선을 넘어선 상태인 직장인에게 사이드허슬은 또 다른 심리적 피로인 번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긱경제 활동이 본격화되었지만 본업 회사의 사내 규정을 잘 확인해야 한다. 2024년 새해에는 사이드 허슬러에 도전하며  커리어 확장과 전환 기회를 미리미리 만드는 건 어떨까.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12.25 00:18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유연 근무환경이 왜 중요한가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한국에 있을 때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런데 미국은 직장인 둘 중 한 명꼴로 정리해고된 적이 있다는 통계처럼 정규직도 고용 안정성이 낮다. 비정규직이나 시간제 근무(알바)를 본인이 원해서 선택하는 사람이 많고, 또 이런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기업들은 매력적인 근무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내가 직접 경험한 미국 수퍼 체인인 트레이더 조와 스타벅스는 유연한 근무시간제 덕분에 알바생들 사이에서 속칭 ‘꿀알바’로 알려졌다.   트레이더 조 알바를 시작하고 가장 놀라웠던 점은, 매장에서 동시에 일하는 사람은 25명 남짓인데도 그 다섯 배가 넘는 140여 명의 시간제 직원이 고용돼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의아했었는데, 곧 궁금증이 풀렸다. 시간제 근무 직원은 본인이 일하고 싶은 요일, 시간대, 총 근무량을 제출하고, 그러면 거기에 맞는 근무 스케줄이 확정되어 나온다.     ■  「 트레이더조·스타벅스 ‘꿀알바’ 시간제 노동자 예상밖 활성화 근무시간·요일 등 손쉽게 조정 고용주 입장에서도 결국 유리 」    김지윤 기자 어떤 사람은 주 40시간을 일하고, 치위생사인 동료는 주 20시간, 또 현재 대학 공부를 하는 한 알바생 동료는 일요일에만 나온다. 낮에는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는 한 동료는 스플릿이라고 해서 아침에 세 시간 근무하고 돌아갔다가 밤에 다시 나와 세 시간을 일한다. 이렇게 모든 직원이 각기 다른 근무 시간대와 근무량을 갖고 있어 결국 총고용 알바생 수가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나는 처음에 주 15시간을 신청해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출근했다. 섹션 리드로 승진한 후엔 제품 주문과 디스플레이를 책임지면서 주 4~5일 일하고 있다. 물론 내가 선호하는 시간에 나가고, 내가 선호하는 요일에 쉰다. 휴가도 3주 전에만 신청하면 최장 30일까지 갈 수 있다. 알바생이 많기 때문에 내가 휴가를 길게 간다고 동료들의 일이 많아지는 게 아니다. 높은 시급 이외에 이런 근무 시간 유연성은 좋은 직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선순환의 시작점이 된다.   두 번째 놀라웠던 점은 시간제 동료들끼리 근무 시간을 서로 쉽게 맞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다. 갑자기 주말에 일이 생겨 출근을 못 할 것 같으면 해당 직원은 내부 시스템에 ‘시프트 오픈’ 공지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그 시간에 근무가 가능한 직원이 ‘시프트 픽업하기’를 클릭하면 바로 시프트가 옮겨진다. 학기말 시험 준비를 하거나 아이 돌보기 등으로 갑작스럽게 일을 못 하게 된 직원은 본인 일하는 시간을 쉽게 조정할 수 있어서 좋고, 또 그 시프트를 픽업한 직원은 추가로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제도이다. 회사나 매장 입장에서도 필요한 인력에 펑크가 안 나니 삼자 모두에 좋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노동시간 유연성은 스타벅스도 마찬가지이다. 스타벅스의 경우는 좀 더 유연해서, 내가 소속된 매장뿐만 아니라 옆 동네 매장에서 사람이 필요하면 그쪽으로도 순환 근무가 가능하다. 스타벅스는 어느 매장을 가더라도 음료·음식 메뉴는 물론 커피 머신을 비롯해서 숟가락·빗자루·쓰레받기·행주 하나까지 동일하다. 다른 매장에서도 내 매장에 있는 것처럼 바로 익숙하게 일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유연 근무가 가능한 시스템 표준화의 힘이다.   세 번째로 놀라웠던 점은 근무량과 연계된 의료보험제도다. 알바생도 직장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지난 6개월간 총 몇 시간을 근무했는가에 따라 직장 의료보험 자격이 주어진다. 예를 들면 상반기 동안 총 700시간 일하면 (주평균 약 26시간) 모든 의료보험 자격이 주어지고, 300시간 일을 한 경우엔 안과·치과 보험 자격만  주어진다. 기준 기간에 일한 총 근무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평가기간을 한두 달 남기고 혹시라도 시간수를 못 채울듯한 사람이 있으면 근무시간을 늘리라고 고지해 의료보험 자격을 유지하도록 한다.   물론 노동 문화와 노동 정책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의 트레이더 조나 스타벅스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 명이 빠지면 당장 남아 있는 직원에게 일이 전가되어 할 일이 많아지는 근무환경이 대부분인 한국 리테일 산업에서 이런 유연한 근무환경을 꼭 고려해 보았으면 한다. 언뜻 보면 고용주 입장에서 필요인력보다 더 많은 알바생을 고용·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클 것 같지만, 필요한 때 필요한 직원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비즈니스 기회를 100% 살릴 수 있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미국에 추수감사절 휴일과 크리스마스 휴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내부 시스템에는 시프트 교환이 시작되고 있다. 완전가동이 필요한 회사와 직원들 모두가 윈윈하는 시스템이지 않은가.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11.20 00:23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미국의 ‘팁플레이션’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팁(Tip), 얼마면 되겠니?   스타벅스 바리스타 알바와 리프트(공유차량서비스) 운전 알바를 하면서 팁을 주다가 이제는 팁을 받는 입장이 됐다. 지인들로부터 “팁은 얼마나 줘야 하나” “팁을 적게 주면 화를 내나” 등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국의 팁 경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가 됐다.   유럽에서 들여온 팁 문화는 ‘신속한 서비스를 해달라(To Insure Promptness:TIP)’라는 의미다. 주문할 때 팁박스에 돈을 넣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팁은 감사와 만족도 표시로 서비스를 받은 후에 주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팁이 처음 도입됐을 때는 뇌물이라는 비판과 노동자 임금을 고객에게 부담시킨다는 이유로 한때 금지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호텔·레스토랑·바 등을 중심으로 퍼져 지금은 미국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가 됐다.     ■  「 ‘서비스에 감사’ 뜻하는 팁문화 팬데믹 이후 28%까지 높아져   낮은 최저 시급 받는 팁노동자 일반 노동자와 동일임금 추세 」    실리콘밸리노트 10여 년 전만 해도 미국 출장 계획이 잡히면 1달러짜리 지폐를 먼저 준비했다. 호텔에서 가방을 들어주면 1달러, 호텔방 청소에 1달러, 와인 오프너라도 갖다 달라고 해도 1달러를 줬다. 레스토랑에선 15% 정도 팁을 주면 인색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팬데믹을 겪은 요즘은 팁플레이션(팁+인플레이션)이 회자할 만큼 팁 요율이 25%, 나아가 28%까지 올랐다.   요율 상승 이외에도 팁 문화 자체도 바뀌었다. 계산하며 팁 요율 옵션을 선택하도록 은근히 강요받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받기도 전에 태블릿 결제창에서 팁 선결제를 요구받기도 한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6명이 미국의 팁 문화는 통제 불능 상태에 들어갔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팁 생태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최저시급제다. 미국의 최저시급은 연방 정부가 정하는 것, 각각의 주에서 정하는 것, 또 각 도시에서 정하는 것이 있다. 팁을 받는 노동자와 팁이 없는 노동자들의 최저시급도 따로 명문화되어 있다. 보통 팁을 받는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의 최저시급은 팁이 없는 곳보다 훨씬 낮다. 최근 한국인이 많이 이주하는 애틀랜타가 있는 조지아주의 경우, 일반 노동자의 최저시급이 7.25달러지만, 팁 노동자의 최저시급은 2.13달러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팁 노동자의 경우 팁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높은 팁 요율에 ‘속이 쓰린’ 고객들은 팁 수입이 참 짭짤하겠구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팁 노동자들은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주에서는 팁 노동자들에도 일반 노동자와 동일한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캘리포니아가 대표적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팁 노동자와 일반 노동자 모두 최저 시급 15.5달러를 적용받는다. 구글 본사가 있는 마운틴뷰 지역의 최저시급은 18.15불이다. 캘리포니아 도시 중 두 번째로 높은 금액이다. 이 지역에서는 개인 수입이 연간 12만6000달러 (약 1억7000만원) 이하이면 저임금 노동자로 공식 분류를 하니 이곳의 렌트비나 생활비 물가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 시급 노동자 대부분이 두 개 이상의 일을 하면서 주당 55~60시간 정도 일하고 있다. 부부 둘이 각각 그 정도 일해야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나름 먹고살 수 있다. 운전으로 가족을 돌보는 리프트 동료들은 매일같이 12~14시간 근무하고 있다. 꽤 많아 보이는 최저시급이나 팁을 받아도 생활이 팍팍하다   최근 미국 팁 생태계 경제에 큰 변화가 예고됐다. 2주 전 시카고 시의회는 팁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제를 단계적으로 없애고, 일반 노동자들과 같은 최저임금을 적용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시카고에서 시작된 이번 변화가 미국 전반의 노동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노동자들은 당연히 환영하는 일이지만 경영주 입장에선 일시적으로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알바로 경험한 스타벅스와 트레이더 조의 시스템은 노동자·고용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곳은 팁이 있건 없건 최저 시급 이상으로 임금을 준다. 안정적인 임금을 받는 직원들은 팁에 연연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들은 높은 서비스 품질에 만족하며 더 자주 오고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매출이 오르는 선순환을 만든다. 이런 선순환은 최근 하나둘 증가하고 있는 ‘노 팁’을 선언한 레스토랑들에서도 볼 수 있다. 결국 직원들에게 안정적인 시급을 제공하는 것이 고객·노동자·고용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체계적인 방법 같다. 팁 노동자의 시각이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10.16 00:33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직원평가는 간단하게, 명료하게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미국 수퍼체인 ‘트레이더 조’(일명 트조)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맞다. 최근 ‘한국산 냉동김밥 열풍’으로 출시 2주 만에 미국 전 매장에서 품절대란이 일어난 수퍼체인이다. 국내에선 그전까지 주로 쇼핑 마니아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트조는 신선식품 위주의 그로서리 스토어 체인으로 미국 전역에 540여 개 매장을 두고 있다. 자체 브랜드 상품(PB)으로 차별화된 트조는 직원 만족도가 다른 수퍼체인보다 높은 곳이기도 하다.     ■  「 거의 1년 내내 평가하는 구글 ‘냉동김밥’ 유명한 ‘트조’는 2회 빅테크 기업도 점차 단순해져 평가 목적은 개인 성장 돕는 것 」    김지윤 기자 구글 본사가 있는 도시인 마운틴뷰의 트조 매장에서 크루 멤버로 알바를 시작한 지 6개월을 넘기면서 최근 첫 성과 리뷰를 경험했다. 리테일 분야에서 경쟁사를 앞서나가는 트조에서의 성과 관리 시스템이 지난 25년 넘게 일해 온 글로벌 유수 기업들의 정교하고 체계적인 성과 관리와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구글을 비롯한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성과 평가 시스템이 너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낭비한다는 비판을 늘 받아왔기에 다른 산업에 있는 회사 평가 시스템에서 시사점을 얻고 싶었다.   첫째, 1년에 두 번 있는 트조 평가 기간은 상당히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진다. 업무 평가로 직원들의 일 집중도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것 같다. 트조에서는 평가 리뷰 안내 이후, 실제 평가가 이루어지고 평가 보고서가 나온 뒤 1대 1 평가결과 미팅까지 모든 것이 2~3주 안에 다 끝난다. 물론 10만 명이 넘는 직원이 각기 다른 복잡한 일을 하는 구글과 같은 기술기업과 5만 명 정도의 직원이 표준화한 일을 하는 트조의 평가 시스템은 다를 수 있다.   다만 직원 입장에서 봤을 때 평가 기간은 가능하면 짧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구글에서는 한 분기 평가가 끝나면 일주일도 채 안 되어 바로 다음 평가 사이클이 시작된다. 평가 사이클이 재개된다는 얘기만 나오면 치과 치료받는 것 이상으로 다들 고개를 흔든다. 이렇게 1년 내내 진행되는 평가는 일 집중을 방해한다. 많은 시간을 평가 준비, 동료 리뷰, 사후 조정 등에 쏟고 있다. 이런 비효율성 때문에 넷플릭스는 연간 평가 제도를 없애고 동료 피드백 제도로 바꾸었다고 들었다.   둘째, 트조 평가 등급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평가 등급은 ‘기대를 충족했다’ ‘개선할 점이 있다’ 딱 두 개뿐이다. 반면에 구글의 평가 시스템은 복잡하기로 악평 났다. 올 초 4등급으로 다소 완화되기 전까지 5등급이었다. 탁월하게 잘함, 기대를 크게 초과함, 기대를 초과함, 기대를 꾸준히 충족시킴, 개선이 필요함. 이렇게 자잘한 등급은 평가자와 피평가자마다 해석 수준이 달라 불만이 일어난다. 사후 조정 단계를 거치지만 평가에 후하거나 박한 매니저에 따라서 ‘기대를 크게 초과함’과 그냥 ‘기대를 초과함’의 등급 정의가 임의적이라고 느끼는 직원들의 불만이 자주 제기되었다. 평가 시스템의 성공 여부는 직원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직원들이 회의적으로 본다면 그 조직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알바생인 내가 느끼기에도 트조 평가 시스템은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평가는 지난 기간에 대한 업무 평가이다. 그렇지만 평가 내용을 리뷰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얘기한다. 알바생인 나의 미래 성장 기회에 대해서 얘기해준다. 매니저와의 미팅에서 나는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회사 경험을 살려서 매장 성공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대화 이후 딱 1주일 뒤에 매장의 쿠키·캔디 섹션리드 역할을 제안받았다. 섹션리드란 매장의 한 분야를 맡아서 제품 주문부터 재고관리, 제품 디스플레이까지 맡는 자리다. 신참 알바생의 의견도 귀 기울여서 듣고 성장 기회를 찾아주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나는 6개월 만에 트조에서 섹션리드가 되었다.   늘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기업이 성장한다고 자동으로 내가 성장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개인이 성장하도록 돕는 매니저와 회사가 중요하고, 자신의 성장을 늘 돌아봐야 한다고 말이다. 이번 성과 평가로 알바 시급이 시간당 1달러 올랐다. 1년에 두 번 평가하니, 한 번 더 오르면 1년에 10% 넘게 임금이 오를 수 있다. 트조에서 장기간 알바를 해 온 동료 중에는 다른 곳보다 두 배 높은 시급을 받는 사람도 있다. 트조가 제품력과 고객 감동으로 유명해졌지만, 그 뒤에는 직원들의 성장을 독려하고 진정한 파트너로 대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성심껏 일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1년 프로젝트인 ‘실리콘밸리 몸체험’의 하나로 시작한 트조 알바지만, 내가 다시 회사 생활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한 주에 8시간 정도 트조 알바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9.11 00:29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스타벅스 바리스타 실습기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이름을 새긴 초록색 에이프런을 두르고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커피샷을 내리고 스팀기로 우유 크림을 만든다. 주문한 고객 이름을 부르며 크림을 예쁘게 얹은 커피를 전해준다. 미국 트레이더조 수퍼, 공유운전 리프트 알바에 이어 ‘실리콘밸리 몸 체험’ 중 하나로, 세계서 가장 유명한 카페 브랜드인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바리스타를 꼭 해봐야겠다는 계기가 있었다. 17년 전 구글 입사 면접을 보기 위해 하루 일정으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다. 긴 비행시간과 시차로 지친 상황에서 온종일 1대 1 면접을 했다. 당시 최고 리더십팀에 있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총괄 부사장과 최종 면접을 했다. 인터뷰 후 그가 고생했다며 마이크로 키친(간식거리가 있는 휴게실)으로 나를 안내하더니 무슨 커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직접 커피콩을 갈고,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원두 커피샷을 내리고, 우유를 스팀기에 넣고 우유 거품을 만들었다. 진심으로 만들어준 커피 한 잔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 같았다.     ■  「 구글만큼 까다로운 면접 질문 두 달간 체계화된 교육 받아야 전 세계에 균일한 서비스 제공 」    김지윤 기자 그 부사장에 감동하였다. 나도 언젠가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달 전 스타벅스 바리스타 일을 시작했다. 다양한 커피 제조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1999년 창업해 지금은 전 세계 40만 직원과 3만5000여 매장을 갖고 있는 스타벅스의 성공 비결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바리스타는 스타벅스의 핵심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일관된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비결은 엄격한 채용 과정과 교육 시스템이다. 채용 면접에서는 “대부분의 팀원과 의견이 안 맞을 때, 그러나 내 의견이 너무 좋다라고 확신할 때 어떻게 해결을 하는가. 실제 있었던 사례를 들어달라” 등과 같은 특정 상황에 관한 질문을 한 시간 동안 받는다. 어렵게 면접을 통과해도 교육 전담 매장에 가서 2주간 이론과 실습 교육을 받는다.   교육 첫날 예비 바리스타 전원에게 아이패드를 줬다. ‘바리스타 첫 60일’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 채용 후 두 달 동안 매일 해야 할 내용이 동영상과 텍스트로 제공됐다. 커피 만드는 실기에 앞서, 커피의 역사와 좋은 커피콩 재배 과정, 공정 커피가 중요한 이유, 그리고 커피를 음미하는 방법도 배웠다.   마지막 실습 교육 때는 수십 개의 레시피를 익혀야 했다. 만들고 쏟아 버리고 또 만들고 또 쏟아 버렸다. 한 모금 시음만 하고 쏟아버릴 때는 재료비가 아까울 정도였다. 교육 기간 동안 약 200잔 넘게 연습 삼아 만들었다. 교육에 대한 아까워하지 않는 투자가 전 세계 모든 매장에서 일관된 품질을 제공할 수 있는 비결 같았다.   2주간 교육이 끝나고 실제 매장 근무가 시작됐다. 첫 4주는 선배 바리스타와 짝을 맺어줘서 궁금할 때마다 바로바로 도움을 받았다. 함께 일하는 바리스타들의 협업 문화가 인상적이었다. 손님들이 몰리는 아침 출근 시간에는 대여섯 명의 바리스타들은 눈빛만 주고받으면서 옆 바리스타에게 주문이 밀려있는 것을 보면 바로바로 도와준다. 스토어 매니저와 시프트 매니저는 커피바와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음료 재료를 보충하고 얼음을 나르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등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이렇게 80여개 국가에서 스타벅스가 균일한 품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배경에는 신중한 채용 과정, 꼼꼼한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서로 협업하는 문화가 있었다.   물론 막상 바리스타가 되어보니 ‘현실 바리스타’는 낭만적으로만 바라봤던 바리스타와는 달랐다. 주부습진이 염려될 만큼 물을 계속 만져야 했고, 고객들이 속사포로 쏟아내는 각종 억양의 영어를 알아듣고 주문 시스템에 넣는 일은 비영어 원어민으로서 스트레스가 매우 큰 일이었다. 또한 100가지가 넘는 생소한 음료 이름과 각각의 레시피를 외워야 하고, 메뉴에 없는 주문도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아이스 라테인데 아이스가 없이 달라고 하거나. 휘핑크림을 위에도 얹어주고 컵바닥에도 깔아 달라고 하거나, 개그 콘서트에서나 나올 법한 ‘아이스 핫초콜릿’을 주문하는 경우에는 주문 시스템에 어떻게 넣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라떼 만들 때 우유 온도를 65도에 맞춰 달라는 고객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또한 두 달 정도 현실 바리스타가 되어 보니 스타벅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해서 근로 환경과 처우 개선에 목소리를 모으는 것에도 공감이 갔다. 그래도 커피 음료 이름만 대면 레시피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17년 전 구글 부사장이 내게 만들어줬던 실크 빛깔의 카푸치노를 나도 후배들에게 맛있게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8.07 00:50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구글과 애플의 친환경 경영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환경문제와 기후위기에 대해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테크기업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 지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게 있다면 매일매일의 친환경적 생활이다. 탄소중립이나 탄소발자국 같은 거창한 개념을 되새기지 않는다 해도, 가방에는 늘 재활용컵을 넣고 다니고, 공항 갈 때는 목베개와 함께 빈물통을 꼭 챙기고, 장 보러 갈 때는 재활용 시장바구니 서너 개를 챙긴다.   자동차 없이 자전거로 미국 생활 1년 반을 버틴 후에는 전기차를 운전하고 있다. 한국에서 살 때는 쓰레기 재활용 분리수거가 일상적 실천이었다면, 미국 생활에서는 쓰레기가 나오기 전에 쓰레기양을 줄이고 에너지 오염을 사전에 줄일 수 있는 모든 활동에 좀 더 민감해졌다. 지역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는 기업과 이웃의 실천을 매일 보고 들어서 일 것이다.     ■  「 탄소발자국 줄이는 테크 기업 직원용 전기차 무료충전 혜택 전력사용 적을 때 핸드폰 충전 ‘지속가능’은 선택이 아닌 필수 」    김지윤 기자 기업 차원의 경우 친환경에 대한 책임이 중요해져서 제품 생산, 포장, 배송 단계에서 지속가능 경영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탄소중립과 재활용 에너지 사용 100% 목표를 향해가는 구글·애플과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직책명은 조금씩 다르지만 ‘지속가능경영 최고책임자(Chief Sustainability Officer)’라고 불리는 전문지식과 경험을 가진 임원을 두고 있다. 또한 친환경적 기여를 높였는지 매년 그 성과를 공유하는 정기 보고서를 발간할 뿐 아니라 신제품 발표에서도 해당 상품이 탄소중립 등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소개한다. 이들 기업은 자사 제품 소비자들이 탄소 배출량 감축에 동참할 수 있는 다양한 신기능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예컨대 구글지도는 목적지로 가는 여러 가지 루트가 있을 경우, 실시간 교통량과 교통신호 등을 고려해 탄소배출이 가장 적은 노선을 먼저 추천하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애플 아이폰에 있는 클린 에너지 충전 기능은 사용자가 위치한 지역의 탄소 배출을 예측해, 전력 사용량이 적은 시간대와 탄소 배출이 적은 청정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때에만 선택적으로 충전이 되게 하는 기능이다. 현재 미국에서만 제공되며 원하는 사용자가 선택하는 기능이다. 또 아마존은 배송일이 다른 여러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 ‘박스양을 줄이세요’ 문구가 뜨면서 같은 날 묶음 배송을 추천한다.   이들 테크 기업들은 직원들의 전기차 운전도 장려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테슬라의 본고장인 캘리포니아주에는 전기자동차가 유독 많다. 특히 실리콘밸리 지역의 전기차 비율은 10대 중 2대꼴로 미국 평균치인 2%의 10배에 이른다. 팬데믹 기간 중 구글 본사 캠퍼스 주차장 여러 곳이 전면 보수되었는데, 전기차 주차 구역이 서너 배 이상 늘어났고, 위치 또한 사무동 가장 가까이에 있다. 가솔린차 주차 구역은 상대적으로 훨씬 먼 곳에 배치해 가솔린차 운전자를 ‘은근히’ 자극하고 있다. 물론 직원들의 캠퍼스 내 전기 충전은 무료이다. 갤런당 가솔린 가격이 다른 주보다 1달러 이상 높은 캘리포니아주에서 무료 충전 혜택은 직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비단 테크기업뿐 아니라 최근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트레이더 조 수퍼마켓(일명 트조)도 친환경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이다. 트조는 1970년대 업계 최초로 재활용 장바구니를 도입한 이후, 다양하고 예쁜 디자인의 장바구니를 아주 낮은 가격에 보급하고 있다. 미국에서 4달러가 채 안 되는 트조 재활용백이 한국 중고거래 사이트서 ‘잇템 (꼭 있어야 하는 아이템)’으로 1만5000원 넘게 거래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트조는 자체 브랜드 제품이 80%를 넘게 차지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적인 제품 포장이다. 박스를 열어 보면 70~80%가 ‘빈통털털’인 일부 한국 과자들의 과대포장 예를 트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매장 크기가 작은 트조는 효율적인 진열을 위해 제품 개발 때부터 포장박스의 가로세로 크기도 미리 고려해 최대한 실제 내용물 크기에 딱 맞게 만든다. 또한 해양동물들이 목에 걸려 위험에 처하게 하는 맥주 6개들이 묶음용 플라스틱 고리 대신에 트조 맥주는 종이 홀더에 들어 있다. 재활용백을 깜박 잊고 안 갖고 온 손님에게 “봉투 필요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들은 “미안해요, 오늘 재활용백을 안 갖고 왔어요, 하나만 사러 들렀는데, 계획에 없던 것을 너무 많이 되었어요”라고 대답하며 미안해하기도 한다.   친환경 기업만큼 친환경 생각을 가진 고객들로 가득한 트조. 앞서거니 뒤서거니지 이렇게 기업과 소비자는 늘 함께 간다. 지속가능경영이 기업들의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기업과 소비자가 친환경을 함께 실천할 때 이 지구를 기후위기에서 한 발짝 벗어나게 하지 않을까 싶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7.03 00:46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교통약자 지원하는 승차공유앱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택시앱이 보편화하면서 길거리에서 손들고 택시 잡는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앱으로 택시를 부르는 문화는 2009년 승차공유 우버(Uber) 앱 출시 때 시작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스타트업 우버는 승객과 운전자를 연결해주는 위치 기반 정보 기술을 바탕으로 승차공유 개념을 선보였다. 승객과 운전자들에게 편리성과 효율성을 제공했지만, 기존 택시 업계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고 노동자 권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현재 미국 승차공유 시장은 우버와 후발 주자 리프트(Lyft)가 양분하고 있다.     ■  「  미국 승차공유 제도 10주 체험 승객에 필요한 도움 미리 질문 운전자 안전운행 교육에 방점  」    실리콘밸리노트 실리콘밸리를 직접 체험하는 ‘실밸리 몸체험’의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난 3월 초 리프트 운전을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에 따라 승객을 A지점에서 태워 B지점에 내려주는 단순한 일이지만, 모르는 사람을 태우고 예상 시간에 맞게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긴장된 미션이었다. 지난 10주 동안 주 5일 하루 평균 2시간 정도 운전을 했고 약 300회 운행을 마쳤다.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는 건 배움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테크기업 직원, 벤처 투자자, 각종 패스트푸드 알바생, 대부분이 이민자인 간병인 등등. 2주 전 태웠던 한 시각장애인 승객은 풋볼 코치였다. 3년 전 공에 잘못 맞아 양쪽 각막이 손상되어 긴급 수술이 필요했지만 팬데믹 기간 중 수술 일정을 바로 못 잡아 안타깝게도 실명하게 되었다. 불평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지팡이 짚고 걷는 연습을 했다. 석 달 동안 걷는 연습하니 혼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요즘은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 카운슬링도 하고 있다. 그와 8분 거리의 짧은 대화를 나눴지만 인생 수업을 듣는 것과 같았다. 리프트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승차 공유 운전자 체험을 하면서 리프트가 어떻게 운전자 수익성과 웰빙을 지원하고 교통약자 승객을 지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운전자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 빠르게 제공한다. 운전자 앱에서는 어느 요일, 몇 시, 어디로 운행하러 가는 게 좋을지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동네별 대기시간도 1분, 2분 이런 식으로 한눈에 보여준다. 주변에 공항이 있다면 시간대별로 몇 명의 승객이 비행기에서 내리는지도 알려준다. 또 다른 유용한 정보는 동료 운전사에게서 나온다. 리프트에는 멘토 시스템이 있다. 새롭게 시작한 운전자가 잘 정착하도록 동료들이 각종 팁을 주고 질문에 답을 해주는 시스템이다. 좋은 평점과 운행 기록이 있는 운전자라면 누구나 멘토 신청을 할 수 있고 멘토가 되면 장려금을 준다. 운전자들끼리 서로 돕는 관계를 만들어준다.   둘째, 교통 약자를 배려하는 시스템이 있다. 리프트 예비 운전자가 받는 교육 중에는 교통약자 승객 보조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교육 중 강조한 것은, 장애가 있는 승객이라고 어떤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아라, 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먼저 손을 잡고 부축하는 행동은 자존감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도움을 드릴까요” 묻고 나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휠체어와 보행보조기를 접고 펴는 방법과 차에 싣는 방법도 배웠다. 교통약자 승객들이 차를 타고 내릴 때는 세심한 주의와 시간적 배려가 필요하므로 해당 승객을 태운 운전자에게는 특별 보너스가 제공된다.   셋째, 운전자들의 웰빙을 돕는다. 리프트에서는 반경 몇 마일 이내에서 이동하는 승객만 받을 수 있도록 영역을 지정할 수 있는데, 한번 지정을 하면 3시간 동안만 유효하다. 3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운전자들이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3시간 내내 운전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리프트에서는 휴식시간을 가져도 3시간에서 까먹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해라, 15분 휴식시간은 괜찮다’라는 공지가 지속해서 뜬다.   또 마지막 운행을 하고 최종 목적지로 갈 때는 방향이 같은 승객콜만 받을 수 있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시간도 설정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 시간 안에 승객 운행을 마칠 수 있는 승객콜만 받게 된다. 운전자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정신적·육체적 웰빙을 누릴 수 있도록 설계했다.   지난주 미국 미네소타주 의회에서 승차공유 운전자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후 운전자-승객-플랫폼 3자간 역할과 기대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지난 10주간의 체험 동안 시간당 평균 적게는 15불, 많게는 35불 정도를 벌었다. 치솟는 연료비, 자동차 감가상각비, 세차비용, 보험료, 등의 제반 비용을 고려하면 운전자 입장에서 최저 시급 논의는 반갑게 들린다. 운전자-승객-플랫폼 3자가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5.29 00:46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미국 수퍼 ‘트조’엔 특별한 게 있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미국에 살면서 특이하다고 생각한 곳이 있다. 트레이더 조(Trader Joe’s) 수퍼마켓이다. 한인 사이에서 ‘트조’라고 불리는 트레이더 조는 캘리포니아 1호점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560여 매장이 있다. 전국적 체인이지만 동네 단골 마트를 지향하는 트조는 직원들의 밝은 표정과 친근한 태도로 매번 나를 즐겁게 한다.   이를테면 계산대 직원은 “How are you doing?” 인사로 시작해서 이 제품은 내가 사용해보니 이런 게 좋더라, 나는 이런 레시피를 사용하는데 당신은 어떠냐, 등등 고객과 공감 어린 대화를 나눈다.   최근 ‘실밸리 몸체험’이라는 개인 프로젝트의 하나로 집 근처 트조 매장에서 파트타임 근무를 시작했다. 밖에서 보았던 트조에서 ‘크루(트조에서 직원을 부르는 말)’로 일하면서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감탄사가 터졌다. 그만큼 다른 곳에 적용할 시사점이 많았다.     ■  「 “제품이 좋으면 돈은 따라온다” 정직원·임시직원 동등한 대우 매장내 협업과 소통 도드라져 챗GPT에는 없는 인간적 교감 」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첫째, 제품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16년 전 구글 근무를 시작할 때 창업자들이 강조했던 말이 있다. “제품을 만들 때 고객을 먼저 생각하라.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였다. 트조 근무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은 말도 비슷했다. “마케팅 필요 없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좋은 가격에 제공하는 것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트조 창업자의 철학이다.   다른 수퍼 체인들이 1만2000개 품목을 취급하는데 반해 트조는 4000개 제품만 엄선해서 판매한다. 80% 이상이 자체 브랜드다. 트조 브랜드 상품은 더 좋은 기름, 더 적은 소금, 유기농 재료를 사용해 오리지널 브랜드 제품보다 더 선호된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또 트조는 판매자가 제안하는 입점 비용을 일체 거부한다. 대신 그 돈으로 제품 단가를 낮춰 달라고 한다. 단위 면적당 매출액이 가장 높은 수퍼 체인이 된 비결이다. 고객 만족도에서도 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둘째, 고객 만족은 직원 만족부터 시작된다. 트조는 동종업계 최고의 시급을 준다. 주당 근무시간과 시간대를 직원들이 고를 수 있다. 직원 20% 할인, 매주 신제품 무료 제공, 무료 헬스클럽 등등, 대우가 좋다. 월급을 받는 정직원과 시급을 받는 크루들은 모두 동일하게 존중받는다. 크루들 간 협업이 원활할 수밖에 없다.   아르바이트 5일째였다. 창고에서 스파게티 소스 박스를 옮기다 놓쳐서 박스에 들어있는 모든 병이 깨졌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크루 대여섯이 빗자루·걸레·티슈 등을 들고 뛰어왔다. 그들은 먼저 내가 안전한지를 확인한 뒤 청소를 시작했다. 3분이 채 안 걸려 창고 바닥이 깨끗해졌다. “이제야 트조 진짜 직원이 된 거다. 뭔가 깨지 않고는 진정한 트조 직원이 될 수 없다” “나는 블루베리 팩을 떨어뜨려 블루베리가 온 매장을 뒤덮었다. 너는 창고에서 깼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라며 내 마음을 도닥여줬다.   셋째, 창의적인 기업문화다. 예컨대 트조에만 있는 것이 있다. 계산대에 걸려 있는 작은 종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직원들은 그 종을 두드린다. 가격 바코드가 안 붙어 있을 때 종을 두 번 두드리면 근처에 있던 크루가 달려와서 해결해준다. 매장 계산대가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있는 다른 수퍼체인과는 달리 트조에선 두 계산대가 쌍을 이루고 있다. 캐셔 둘이 한 공간에서 등을 대고 계산대를 운영한다. 한 명이 좀 더 바쁘면 다른 한 명이 뒤돌아서서 도와줄 수 있다. 장바구니에 물건 넣기, 상품 스캔하기 등을 거들어준다. 서로 쉽게 돕고 도움받는 시스템이다.   넷째,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성이다. 트조는 재활용 쇼핑백이 드물었던 1970년대 가장 먼저 재활용 장바구니백을 도입했고, 고객에도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 고객 열 명 중 예닐곱이 재활용백을 쓴다. 또 창업 초기부터 팔기는 어렵지만 상태가 좋은 제품을 선별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준다. 아주 작은 흠이 있는 제품은 절대 팔지 않는다. “너 이거 돈 주고 살 거야?”라는 물음에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바로 내린다. 당장의 수익을 생각하면 아깝겠지만 해당 제품이 형편이 안 좋은 이웃에게 돌아가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대세인 시대다. 모임에선 챗GPT나 생성AI 등을 언급하려면 만원을 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AI가 시나 소설을 쓰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또 작곡까지 한다.  미래에 내 직업이 과연 남아있을까 하는 자조적인 얘기도 한다.   이번에 트조 몸체험을 하면서 “트조는 사랑이죠”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이유를 알게 됐다. 같이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공감대와 인간적 교감은 AI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4.24 00:46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실리콘밸리 해고 칼바람과 실버라이닝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3년 전 미국 본사로 옮겨와서 팀원들을 뽑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정말 잘 뽑았다’고 생각한 유능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보다 일을 더 잘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 고용 안정성에 대해 불안해하며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과거 근무했던 직장들의 구조조정으로 본인 뜻과 상관없이 연거푸 회사를 떠나야 했었다. 미국 직장인 2명 중 1명꼴로 구조조정에 의한 해고를 당한다는 데이터를 보니 그 불안이 이해됐다. 이렇게 해고가 흔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해고된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 대형 테크기업 거센 해고 바람 올해 매주 1.5만명 일자리 잃어 테크기업엔 효율 다지는 시간 다른 산업군엔 인재 영입 기회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미국에서는 본인 잘못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해고(fire)와 회사 구조조정에 의한 해고(layoff)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이제 2022년과 2023년. 실리콘밸리에는 그야말로 해고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전 세계 거시경제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경영 효율성이 우선시되면서 작년 말 메타(페이스북 모기업)로 시작된 해고 바람은 재무제표가 탄탄하고 현금 보유량도 많아 큰 걱정 없어 보이던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로 이어졌다. 이 기업들은 각각 1만명, 1만 20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이들에 이어 세일즈포스, 페이팔, 스트라이프, 델 등 중견 기업들도 대량 해고 대열에 참여했다. 미국 해고 데이터(layoffs.fyi)에 따르면 2022년 한해 미국 테크기업에서만 약 16만명의 구조조정 해고가 있었으며, 2023년에는 두 달 동안 약 13만명의 해고가 있었다. 올해 들어 매주 약 1만5000명의 테크 인재들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3월 들어서도 크고 작은 테크 기업들의 추가 해고 발표가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주엔 메타에서 2차로 1만명을 더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더구나 스타트업들의 자금줄로 그동안 실리콘밸리 혁신의 지지대 역할을 해온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여파로 실리콘밸리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해고 바람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칼바람 속에서도 실리콘밸리를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있다. 일자리 정보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링크드인(Linkedin.com)에서는 최근 테크기업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layoffs’ ‘#opentowork’처럼 해시태그(#)와 함께 본인 해고 상황을 알리며 일자리 정보를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딱한 상황은 비자 문제가 걸려있는 외국인들 경우다. 인도 출신 엔지니어는 “이제 딱 30일 남았다. 30일 안에 다른 직장을 찾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피가 마른다. 일자리 찾는 데 도움 달라”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에는 100여개 넘는 댓글이 달리며 모르는 사람들조차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봐 주고 연결해주고 있다. 구글을 그만둔 직원들의 알럼나이 모임인 ‘Xoogler(주글러)’는 동료들의 지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글러에서는 구글의 해고 발표가 나자마자 해고된 1만2000명을 대상으로 마인드 컨트롤과 명상 등의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또 구직자와 구인자를 연결해주는 네트워킹 오프라인 모임도 만들어 발 빠르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차가운 해고 바람 속에서 따뜻한 인간미와 동료애를 느낄 수 있다.   이번 대형 테크기업들의 대량 해고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산업계 간 인재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실리콘밸리 테크기업들은 높은 연봉과 카페테리아 공짜 식사나 마사지 등의 최고 복지 시설로 고급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큰 테크기업의 대량 해고에 실망한 인재들은 이제 테크 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계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그동안 인재 영입에 목말라 왔던 스타트업이나 다른 산업계에서는 고급 인재 확보에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엔지니어들의 이력서가 들어오고 있다고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테크기업들의 대량해고가 이어진 최근 6개월간 미국의 비(非) 테크 기업에서 약 50만명 이상의 인재 채용이 있었다는 데이터가 나오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해고가 불투명한 거시경제 전망 때문이 아니라 경쟁 회사들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모방 해고(Copycat Layoffs)’라는 비판도 받지만, 이번 대량 해고가 그동안 ‘사람부터 뽑아놓고 보자’ 식으로 달려왔던 테크기업들이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은 확실하다.   인재들의 산업간 이동도 의미 있는 일이다. 구름 뒤에 해가 있을 때 구름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희망의 실버 라이닝처럼, 테크기업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효율성을 다져서 더 큰 혁신을 가져오길 기대한다. 또 자리를 옮겨간 테크 인재들이 다른 산업 부문에서 가속할 혁신도 내심 기다려진다.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3.20 00:48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다양성 존중은 언어에서부터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이 어우러진 미국에 살면서 포용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늘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다양성 가치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머리로 생각했다면, 미국에 와서는 다양성의 가치를 매 순간 ‘지금 당장 나의 문제’로 느끼고 있다. 검은 머리 아시아인의 외모로, 여성으로, 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최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친구와 시애틀 여행 중에 주변 현지인(백인)들과 대화한 적이 있다. 늘 그렇듯이 아시아인 외모를 한 우리는 “어디서 왔냐(Where are you from)?”는 질문을 받았다. 미국에 와서 정말 아주 많이 받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라고 대답하면 100이면 100명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원래 출신이 어디인데(Where are you originally from)?”라고 되묻는다. 이는 무례한 질문으로 들릴 수 있다. 그 백인 미국인은 ‘미국인이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고 영어가 모국어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고, 아시아인 외모 사람은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야 미국에 온 지 4년 정도밖에 안 됐다지만, 그 한인 친구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미국 사회에서 배제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한다.     ■  「 ‘브라운백 런치’ 속의 흑인 역사 무심코 쓰는 일상의 편견 표현들 성별·인종·문화에 민감해져야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사실 일상에서 편견을 없애고 다양성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는 일은 그런 미국 백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언어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보게 된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역사가 있는 미국에서는 자칫하면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을 낮추본다고 오해받거나, 남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다.   미국에 온 뒤 얼마 안 돼서 매달 기자들과 공부하는 프레스 이벤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별 생각 없이 자주 쓰던 ‘브라운백 런치(Brown bag lunch)’라는 단어를 써서 ‘브라운백 런치 프레스 미팅’이라고 내부 문서를 작성하고 동료들과 공유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조용히 다가와 ‘브라운백 런치’에는 흑인에게 부정적인 스토리가 있으니 다른 말을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 내용을 전혀 몰랐던 나는 바로 인터넷에서 그 용어에 대해 찾아봤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1960년대 한 대학교 학생들이 브라운백(마트 등에서 샌드위치 등을 싸던 종이) 색깔을 기준으로 흑인의 피부색을 측정해서 파티 입장 허용 여부를 가렸다는 내용을 봤고, 그런 이유에서 ‘브라운백 런치’란 말을 피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브라운백 런치를 ‘런치앤런 (Lunch and Learn)’ 으로 바꾸었다. 이를 계기로 나 자신부터 언어 민감도를 좀 더 높이고, 또 어떤 말이나 표현을 써서는 안 되는지 찾아보게 됐다.   회사 직원들이 모아놓은 ‘포용적인 언어 리스트’와 작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발표한 같은 내용의 리스트를 늘 챙겨보며, 외부로 나가는 공식 문서뿐 아니라 내부 문서도 성별, 인종, 장애인,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표현은 없는지 두 번 세 번 리뷰한다. 가능하면 성별을 굳이 나타내지 않아도 되는 성 중립성 단어들을 사용한다. 남편/아내, 남자/여자친구를 지칭할 때는 partner를 사용하는 식이다.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인 대변인은 spokesman 대신 spokesperson을 쓴다. 장애를 나타내는 단어는 일반 표현에 섞어 쓰지 않는다. 시각 장애를 부정적으로 고착화할 수 있는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대신에 ‘인지하지 못한 부분’(not knowledgeable)으로 표현한다. 또한 개발자 용어에서도 포용적 단어를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허용/비허용을 나타내는 화이트리스트와 블랙리스트 대신에 허용리스트(allowlist)와 비허용 리스트(denylist)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가지 문화와 인종이 두드러지는 한국 사회에서 50년을 살면서 놓쳤던 부분을 미국에 살면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시각을 포용하는 일상의 민감도를 높이게 되었다. 내가 소수자로서 나의 나 됨을 존중받고 싶은만큼 우리 주변의 다양한 모습 사람들이 그들 본연의 모습으로 존중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2.13 01:03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새해 결심, 올해도 영어!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지역에는 바트(BART, Bay Area Rapid Transit)라고 하는 장거리 전철이 있다. 코로나 이전 평일에는 약 40만명 넘게 이용했다는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분주한 교통시스템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바트 이용 고객의 40%가 집에서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또 다른 데이터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지역 기술 인재의 약 39%가 해외에서 출생한 사람이라고 한다.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 언어와 문화가 녹아있는 실리콘밸리인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는 생각보다 높은 수치다.   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 (영어)로 일하며 받는 스트레스와 자괴감을 실리콘밸리 사람들의 40% 정도가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안도감도 생긴다. 10명 중 4명은 회의시간에 알아듣지 못한 말에 얼버무리면서 미소로 답했을 것이고, 입을 열기 전에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머리를 부리나케 돌렸을 것이고, 상대방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할까 싶어 대규모 미팅에서는 손들고 질문하기를 망설였을 것이다.   3년 반전 실리콘밸리로 오기 전까지 나는 30년간의 모든 회사 경력을 한국에서 쌓았다. 대부분 직장인처럼 영어는 늘 뒤통수를 당기는 스트레스였다.     ■  「 다양한 출신들 모인 실리콘밸리 인구의 40%는 비영어가 모국어 직장인의 영원한 스트레스 영어 절실함·꾸준함이 비법 아닌 비법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해도 해도 늘지 않는 것 같거니와(물론 그다지 꾸준히 심각하게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어렸을 때 영어권에서 살았던 친구들이라도 있으면 곧 부러움이 생겼고, 내가 이 나이에 해봤자 얼마나 달라지겠냐는 생각에 쉽게 움츠러들곤 했다.   그러다 마흔살 해, ‘내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혀가 굳었더라도 영어를 원 없이 공부해보자, 그래서 네이티브 영어 하는 사람만큼 돼보는 것을 목표로 한번 가보자’는 꿈을 만들었다. 당시 아태지역 화상 회의에서 7분 동안 음 소거를 해놓고도 이를 모른 채 발표를 했던 엄청나게 큰 실수를 한 이후다. 그 창피함이 인생 영어공부에 불을 댕겼다.   영어 선생님을 구해 시작한 영어 공부는 현재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좋은 영어 콘텐트들이 있는 유튜브는 그 자체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감되는 유명 영어학원의 스타 강사들의 강의도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양질의 콘텐트 뿐 아니라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필요했다. 맘이 맞는 회사 동료들과 그룹을 만들어 같이 공부하면서 좀 더 재미가 붙었다. 또 친구들과 그룹채팅방을 만들어 매일매일 영어표현 한 개씩 올리며 서로 독려했다.   직장인들이 영어를 잘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절실함이다. 영어를 정말 향상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있어야 공부를 중단하지 않을 수 있다. 한 달 안에 영어회화 완성, 50일 만에 귀 뚫기 등의 현란한 문구로 혹하게 하는 공부법이 있지만, 영어 공부에 쉽고 빠른 길이란 건 없는 것 같다. 일단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게 언어 능력이다.   몇달 전 회사에서 2박3일 행사를 마치고 팀원에게 수고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일찍 가서 쉬어요. 피곤하죠(Go home early, You are tired)’ 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몇 분 후 답장이 왔나 싶어 전화기를 확인하는 순간, 아뿔싸, tired를 fired로 잘못 타이핑을 했던 것이다. 결국 내 메시지는 ‘피곤하죠’가 아니라 ‘당신 해고됐어’였다.   물론 그 친구에게 바로 전화해서 수습을 했다. 최근에는 한 매니저에게 “당신은 팀원들을 참 ‘인간적으로’ 대한다”는 뜻으로 “You are taking care of your teammate as ‘a human’” 이라고 말했다. human은 외계인 혹은 동물에 상대되는 말로서의 인간을 말하기 때문에 이 경우엔 person을 써야 했다. 그 친구는 내 의도를 알기에 “You mean as a person”이라고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속으론 뜨끔했다.   오늘도 이렇게 실수하고 배운다. 내가 영어 오디오북을 일 년에 60여권 정도를 듣고, 매일 두세 시간을 영어공부에 쏟고 있어도 느는 것이 바로바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서너 달 만에 만나는 동료들은 달라진 내 영어를 알아챈다.   올해도 한국 직장인들의 1위 새해 결심이 영어공부라고 한다. 언어는 단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만이 해답이다. 새해, 다시 한번 영어다.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3.01.09 00:42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리턴 투 오피스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늘 묻는 말이 있다. “요즘 사무실로 출근하시나요?” “얼마나 자주 나가세요?” 대부분은 일주일에 한두 번, 혹은 많게는 네댓 번 사무실로 출근한다고 대답한다. 사무실 근무를 반기는 친구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다. 많은 미국 기업에서는 원격지 근무와 사무실 출근제를 섞어서 하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보편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다만 지난 코로나 기간 재택근무 시 침실에서 나오기만 하면 출퇴근이 끝나는 ‘시간 절약의 꿀맛’을 절감한 직원들에게 리턴 투 오피스, 즉 사무실 출근을 독려하는 것이 요즘 미국 회사 경영진들의 고민인 것 같다. 달라진 생활 리듬에 적응하는 것과 동시에 실리콘밸리의 만성 교통체증 스트레스를 매일같이 다시 마주할 정신적 맷집도 길러야 하기에 리턴 투 오피스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  「 코로나19 이후 원격 근무 확산 실리콘밸리, 사무실 출근 고민 회사와 직원 사이 의견 충돌도 유연한 운영, 신뢰감 쌓기 중요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실제로 더퓨처포럼 서베이에 따르면 미국 경영진의 3분의 2는 일주일에 3~5일 사무실 근무를 원한다고 응답했지만, 직원들은 3분의 1만이 사무실 근무를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상당한 괴리감이 존재한다. 경영진은 사무실 근무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문화를 결속하려는 목표가 있고, 직원들은 출퇴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할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또 잘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회사 차원의 생산성 가치와 개인 차원의 효율성 및 유연성 가치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까.   나라마다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구글은 지난해 자율적 오피스 근무제를 시작으로 올해 상반기에 주 3일 사무실 근무와 주 2일 원격 근무라는 하이브리드 근무제가 시작됐다. 물론 직원들은 본인 업무 성격에 따라 100% 원격지 근무 혹은 다른 도시 캠퍼스로의 전근도 지원할 수가 있다.   사무실에서 차로 7분 남짓 거리에 사는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 4일 이상 사무실에 나가서 근무한다. 사무실 출근을 하면 아침과 점심, 커피, 자동차 충전, 운동시설 등이 한 번에 해결되기 때문에 원격 근무할 때보다 훨씬 편리하다. 시차 때문에 회의가 이른 새벽부터 다닥다닥 붙어있는 날은 재택근무가 업무 처리에 유리해 집에서 일한다.   내가 사무실 출근을 진짜 반기는 이유는 회사에서 누리는 복지 혜택이 아니라 동료들을 대면할 수 있어서다. 동료들을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울 뿐 아니라 업무 효율성을 높여준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에 있는 나는 매일같이 여러 부서와 유기적으로 일해야 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많은 일이 다른 팀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원격근무를 하는 경우 15분 혹은 30분짜리의 1대 1 화상미팅을 보통 하루에 10개 이상 하면서 팀 간 조율을 통해 프로젝트를 진척시킨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날은 복도를 지나가다가, 휴게실을 가다가 마주치는 동료들에게 그때그때 궁금할 것을 물어보게 된다. 굳이 1대 1 미팅을 하지 않아도 되어, 미팅 서너 개를 줄일 수 있다. 이런저런 개인적인 얘기를 하다가도 자연스럽게 업무 얘기로 빠지게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누게 된다. 이런 새로운 아이디어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씨앗이 된다. 직원들은 사무실 출근의 유용성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된다. 나오지 말라고 해도 본인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또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사무실로 나오게 된다.   또한 구글은 1년 중 4주는 어디서나 근무할 수 있는 ‘웍 프롬 애니웨어 (Work from Anywhere)’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세계 여행을 하든 휴양지에 머물든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다면 전 세계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선택권과 자율권을 주고 있다. 최근 나는 지난 한 달을 한국에 머무르면서 ‘웍 프롬 애니웨어’ 기회를 활용했다. 일을 마친 후나 주말에는 자주 못 봤던 가족과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그중 한 주는 휴가를 사용해서 지리산 종주도 하고 제주도 일주 도보여행도 다녀왔다. 지난 한 달을 태평양 건너에 있었지만 개인 시간을 보내면서 업무도 알차게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직원들을 믿어주는 회사에 대한 만족도도 높아졌다. 개인의 업무 유연성을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과 더불어 리턴 투 오피스를 장려한다면 회사 차원의 생산성과 개인 차원의 효율성은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2.12.05 00:38

  •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가사노동에도 콰이어트 퀴팅을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올여름 MZ세대의 소셜미디어인 틱톡에서 시작된 ‘콰이어트 퀴팅 (quiet quitting)’이  전세계적으로 회자하고 있다. 콰이어트 퀴팅이란 회사 일은 딱 할만큼만 하고 추가적인 노력이나 시간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을 주로 말하는 것이지만, 그 해석은 미국에서도 사람마다 약간씩은 다른 것 같다. 다만 콰이어트 퀴팅을 통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직장의 일과 개인의 생활에 건강한 경계(boundary)를 설정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콰이어트 퀴팅은 아주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늘 얘기해 왔던 일과 삶과의 균형 (워라밸)과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일로부터 ‘콰이어트하게 (조용히)’ 물러날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 즉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에게 콰이어트 퀴팅은 특정 화이트칼라 직장인들만이 즐길 수 있는 사치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일과 병행해 육아와 가사노동을 해야하는 워킹맘이나 워킹대디들에게 있어서 ‘콰이어트 퀴팅’은 더더욱 그림의 떡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장기적으로 육아 및 가사노동과 일을 조화롭게 병행하기 위해 ‘콰이어트 퀴팅’이라는 건강한 경계를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 워킹맘에 쏟아지는 양육부담 나를 위한 시간 확보 노력을 매일 아침 10분 명상 도움돼 체력관리, 최우선 순위 둬야 」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동서양을 떠나 워킹맘에게 있어 자신을 위한 시간을 찾는 것은 힘든 일 같다. 가사나 육아 노동을 파트너와 공동분담하는 것이 좀더 당연시되어 있는 미국에서조차 양육에 대한 역할 기대는 여성(엄마)에 더 쏟아진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10명중 6명의 워킹맘이 파트너보다 집안일을 더 많이 하고 있으며, 10명중 7명은 아이들 학업이나 과외활동 지원에 파트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답했다. 이런 워킹맘들에게 가사노동에서의 콰이어트 퀴팅은 어떤 의미일까?   내 경우 이제 아이가 대학원생이라 일선에 선 워킹맘은 아니지만, 내가 워킹맘이었을때 콰이어트 퀴팅,아니 ‘노이지 퀴팅’을 한 경험을 얘기해보고 싶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막 들어갔을 때였다. 아침마다 아이를 깨워서 등교시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벌렁한 일이다. 잠에서 막 깬 아이를 겨우 세수시키고 식탁 앞에 끌어 앉혀 밥 한 숟가락 떠먹인다. 흐느적대는 아이에게 옷을 입히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겨우 발라놓은 출근길 화장은 이미 땀으로 번들번들거리고 블라우스 등짝은 젖어버린다. 그리고 아이 책가방을 싸면서 알림장에서 빠진 준비물을 발견하곤 드디어 폭발을 한다. 이렇게 20분의 등교 시간은 부정적 기운과의 싸움이다. 출근 전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버린다. 나는 어느날 이 일을 ‘조용히’ 그만두기로 했다.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대신 퇴근 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아침마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20분 아이 등교로부터 퀴팅을 하니 아침 시간이 이제 다 내 시간이 되었다.   7시에 일어나 회사에 가기까지 2시간이 내 시간이었고, 5시에 일어나면 4시간이 온전한 내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에 나는 운동을 했고 공부를 했다. 물론 함께 사시는 ‘이모님’이 계셔서 할 수 있었던 행운도 있었다.   30년의 직장생활에서 보고 배운 것을 정리하고 나누고싶어 올여름에 책을 하나 냈다.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 책에서 가장 많이 할애한 부분이 체력관리다. 한창 워킹맘으로 있을 때 함께 커리어를 키워가고 있는 여성 동료들이 남성 동료보다 자신의 체력관리에 시간 할애를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이외에 엄마· 딸· 며느리 등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하는 워킹맘인 경우 자기 몸 관리에 시간을 내는 건 아마도 가장 마지막 일일 것이며, 자신의 몸관리에 드는 시간은 가장 먼저 포기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본인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가정에서도, 또 직장에서도 성공적일 수 있다.   물론 워킹맘에게 가사노동으로부터의 콰이어트 퀴팅은 쉽지 않다. 특히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은 현 육아 상황에서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침마다 10분 명상과 같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작은 실행을 해보면 어떨까 한다. 물론 안다. 워킹맘, 그 어떤 것도 포기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럴 땐 서로가 토닥토닥이다.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2022.10.31 00:40